단편소설 감천 ③ – 105번지

“어이 ~ 윤검사”

감천 문화마을 입구에 관광객 눈에 뜨이지않는 쪼그만 정자가 하나 있고, 노인네 3명이 멸치를 놓고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그 옆에는 나무의자를 가져다놓고 8순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눈을 돌리자 나보다 늙어빠진 동네 동생이 낮선 노인들과 어울리고 있었고 근 40년만에 스치는 얼굴인데도 나를 또렷하게 기억해서 더 놀랬다. 이들을 외면하려고 하자 맨발로 뛰어나와 내 팔을 잡는다.

감천동 105번지

외지인들은 감천 문화마을 입구에 아미동 비석마을이 있다는 걸 모른다. 복싱 세계 챔피언 장정구와 가수 김수희의 고향이다. 이들이 살던 곳은 “통칭” 아미동 19번지로 불렸다.

이런 이야기를 왜하는가?

아미동 19번지엔 부산시민 화장터가 있었고 감천 문화마을에는 70년대 초까지 공동묘지만 있었다. 감천(甘川洞)은 내 천자로 표기하고 감천엔 물맛이 좋아서 감내(甘內)라는 유래가 있다고 한다. 시체 썩은 물이 달다고 ??

누가 !!!

감천에는 4감에 샘물 하나, 우물 하나, 태극도 뒷문쪽으로 우물 하나, 5감에 오씨네 집 아래 우물 하나, 6감에 우물 하나 있었다. 솔직히 4감 샘물과 공동화장실은 나의 조부님께서 충청도 조치원 만석꾼을 정리해서 지어준 것이고, 다른 우물물에서는 산송장 썩는 물이 흘렀다.

지금 문화마을 터는 대나무숲이었고 암매장한 봉분이 있었고 외지인들은 공동 묘지 위를 걷고 있다. 아미동 19번지와 감천동 105번지는 빈곤과 가난, 수탈에 지친 태극도민의 야반도주를 막기위해서 태극도 청년단원들이 각목을 들고 서있었다.

강현우

그 중심에는 이 자가 있다. 평화롭던 감천 문화마을에서 왠 각목 !!! 태극도주 조철제가 1958년 비명횡사하고 1960년부터 1969년까지 거리마다 골목마다 각목을 휘두르는 태극도파가 횡횡했다. 그리고 대순진리회 맹주 박한경이는 금고를 들고 사라졌다.

가마니 대문에서 죽은지 3개월이 지나도 구멍이 송송송 뚫린 합판 하나를 둔 옆집에서 몰랐다?? 아니다. 산송장을 먹고 산더미만한 구더기가 골목길로 쏟아지더라도 옆집에서는 이것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않았을 뿐이다.

감천 2동 하꼬방과 하꼬방들이 줄을 지어서 지은 이유가 화재를 방지할 목적이었다고 말한다. 아니다. 태극동 가이당 (강당을 그렇게 불렀음. 역사적 사례로 북한에서 숙청당한 허가이가 허 개라는 역사적 사실에 나와있음) 에서 태극도민을 감시하기 좋았다.

태극도 강당에서 보면 태극도민의 일거수 일투족이 육안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들은 골목마다 5호 감시체제를 갖추고, 포령이라는 감투를 나누어주었다. 기억에 남는 건, 3감에 있던 강원도채와 하위 계급이었던 송포령이 생각난다.

단지 이것뿐이다.

나는 감천 문화마을 입구 정자에 앉아서, 그들이 마시던 종이컵에 막걸리를 따르고 있었고, 8순 할머님이 이렇게 덧붙였다. 여기 윤검사가 왕중의 왕일쎄 ~